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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2/23 Alice Walker의 소설론과 작품세계:

 
 
 
 

삶은 변화와 성숙의 터전



 I


흑인여자소설가 앨리스 워커 Alice Walker(1944- )는 “미국의 가장 탁월한 소설가들 중의 한사람”1)이라는 격찬을 받고 있다. 그녀의 처녀작, 그레인쥐 코우플런드의 제 3의 인생, The Third Life of Grange Copeland 는 1970년에, 그리고 두 번째 소설인 머리디언 아가씨, Meridian은 1976년에 출판되었다. 이 논문의 목적은 이 두 소설의 여자주인공들이 인종과 성 차별의 가혹한 억압과 그에 따른 극심한 좌절감에 극도로 시달리는 매우 비참한 생활을 극복하고 자유와 희망 그리고 창의력을 향유하기 위해, 삶에서 어떤 변화와 성숙을 도모, 달성하여, 우리에게 삶과 사회에 가장 이상적인 변화를 초래하는 대전제는 오로지 자기성숙에 있음을 어떻게 역설, 제시해 주는가를 고찰하는 데에 있다. 자기성숙이란 “개인의 자주성, 자립, 그리고 자아실현”2)을 바탕으로 하는 이런 철학―“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가치는 만물과 하나가 되는 완전한 인간성이다”3)―의 실현 과정이다. 워커는 사실주의 소설 기법으로 3대에 걸친 세 여자주인공들의 삶을 말하는 처녀작에서 인종과 성 차별의 억압과 극빈의 피해자들, 그리고 이런 비참한 여건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젊은 여성들이 각각 대응하는 삶들, 다시 말하면, 숙명에 순응하는 일자무식의 마거리트 코우플런드(Margaret Copeland)의 비극적인 삶과 고등학교 교육을 받고 더욱 윤택하고 창조적인 삶을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좌절과 절망에 얼룩진 며느리 멤(Mem)의 삶, 그리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된 손녀 루스(Ruth)가 이런 억압과 질곡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반항정신과 변화욕구로 충만한 삶을 묘사한다. 또, 새로운 형태의 소설(metafiction)기법으로 구성한 머리디언 아가씨 에서는 변화를 초래하기 위해 무조건적인 반항정신과 개혁의지에만 의존하는 자기중심적이고 관념적인 삶보다도 가장 이상적인 변화의 원천인 자기앎, 정의, 그리고 성숙을 바탕으로 한 전인적인 삶과 그 절대적 가치를 신봉하는 머리디언 힐(Meridian Hill)을 창조한다.

워커가 이처럼 매우 상반된 여자주인공들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워커 자신이 지닌 삶의 개혁과 성숙의지, 그리고 그 의지의 실현에 있다. 조지어(Georgia)주의 가장 가난한 시골구석에서 소작인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워커는 작가나 과학자가 되는 꿈의 실현이란 불가능하다는 비감만을 자아내는 현실 속에서 자라난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열심히 노력하면 훌륭한 소설가나 과학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지 않는다. 대학 진학을 위해 애틀랜터(Atlanta)로 가는 버스 안에서 흑인이므로 앞좌석에 앉을 수 없다는 수모를 직접 체험함으로써, 흑인여자들이 가장 가혹한 억압을 받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여인으로서 이런 신념을 굳게 믿는다: “모든 여자는 자신만의 [자유스럽고 창조적인] 생활과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 삶에 생동감을 충만시켜주는 남자를 갈망한다.”4) 이 신념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성숙과정을 반영하는 매우 대조적인 여자 주인공들을 창조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상적인 흑인여자의 진면목을 제시할 수 있다.

게다가, 워커의 이런 신념의 바탕은 억압적이고 부정적이며 궁핍한 생존여건 가운데서도, 흑인여자들 스스로 삶의 변화와 성숙을 도모, 달성할 수 있음을 제시하는 소설 창작에 있다. 그녀에게 소설창작은 바로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변화, 성숙시키려는 꿈과 의지의 실현과정이다. 따라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소설이 아닌 오로지 자신이 읽고 싶은 소설을 쓴다. 자신의 현재 삶이 답답하고 불만스럽다면, 이런 부정적인 요인들을 해소할 수 있는 소설을 창작한다. 왜냐하면 소설을 쓰고 있으면, 많은 극한 상황들 가운데서도 여러 역할들을 수행하면서 상상 불허의 능력을 발휘하는 자신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소설창작을 통해 자기를 현재의 자신 이상의 인간으로 변신시킬 수 있다.


Writing to me is not about audience actually. It's about living. It's about expanding myself as much as I can and seeing myself in as many roles and situations as possible. Let me put it this way. If I could live as a tree, as a river, as the moon, as the sun, as a star, as the earth, as a rock, I would. Writing permits me to be more than I am. Writing permits me to experience life as any number of strange creations.5)


워커가 소설창작 중 현재의 자신 이상의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원동력은 삶의 목적을 자기앎에 두는 데에 있다. 삶의 본질과 지평은 오직 자기앎이라고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만이 자기앎을 바탕으로 진실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자기앎을 전제하지 않을 때, 인간은 그저 어떤 역할만을 수행한다. 다른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위를 답습하기에 급급하여,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창의적인 가능성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무조건 다른 사람의 권위에 굴복하면서 자신을 비하시킨다.”6) 그러므로, 워커는 자기앎이 삶의 전부임을 믿는다. 왜냐하면 자기앎이 그녀에게 삶에서 이것을 해야 하며 저것을 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기앎은 그녀에게 지금의 자기와 어제의 자기가 어떻게 다른가를 깨우쳐 준다.


Part of what existence means to me is knowing the difference between what I am now and what I was then. It is being capable of looking after myself intellectually as well as financially. It is being able to tell when I am being wronged and by whom. It means being awake to protect myself and the ones I love. It means being a part of the world community, and being alert to which part it is that I have joined, and knowing how to change to another part if that part does not suit me. To know is to exist: to exist is to be involved, to move about, to see the world with my own eyes. This, at least, the Movement has given me.7)


워커가 소설창작 중에 자기능력 이상의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으로의 변신을 가능하게 해 주는 또 하나의 원동력은 그녀의 소설 주제에 있다. 그 주제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이거나 유심론과 유물론과 같은 이원론적 관념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목적달성을 위한 혁명의 당위성 역설, 과학과 기술의 예찬, 인종적 편견과 억압 그리고 그에 대한 격렬한 항의와 반발, 사회 계층간의 극심한 갈등과 반목 조장, 종교논쟁, 전쟁, 혹은 집단이기주의를 위한 강경투쟁 선동 등등에 관한 기술이 아니라, 오직 자기자신에 대한 탐구이다. 지금까지 자아탐구에 대해 쓰여진 소설이 드물었기에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워커에게는 스스로 읽고 싶은 소설 중의 소설이다. 그녀는 이런 소설을 읽음으로써 삶의 예지를 배울 뿐 아니라 올바른 방향과 새로운 지평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향상시킨다. 따라서, 그녀는 이런 소설을 쓰는 선구자들 중의 한 작가이다. 요컨대, 그녀는 자아탐구에 관한 소설을 씀으로써, “전인적인 여인, 완벽한 인간, 자기앎에 몰두하여 득의만면의 홍조를 띄는 흑인 여자”8)가 되려고 최선을 다한다.


Flannery O'Connor has written that more and more the serious novelist will write, not what other people want, and certainly not what other people expect, but whatever interests her or him. And that the direction taken, therefore, will be away from sociology, away from the "writing of explanation," of statistics, and further into mistery, into poetry, and into prophecy. I believe this is true, fortunately true; especially for "Third World Writers"; Morrison, Marquez, Ahmadi, Camara Laye make good examples. And not only do I believe it is true for serious writers in general, but I believe, as firmly as did O'Connor, that this is our only hope―in a culture so in love with flash, with trendiness, with superficiality, as ours―of acquiring a sense of essence, of timelessness, and of vision. Therefore, to write the books one wants to read is both to point the direction of vision and, at the same time, to follow it.

When Toni Morrison said she writes the kind of books she wants to read, she was acknowledging the fact that in a society in which "accepted literature" is so often sexist and racist and otherwise irrelevant or offensive to so many lives, she must do the work of two. She must be her own model as well as the artist attending, creating, learning from, realizing the model, which is to say, herself.9) 


무엇 때문에 워커는 “전인적인 여인”이 되려고 최선을 다할까? 그녀는 우리의 의식과 사물들이 지나치게 이분화되었음을 개탄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개탄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한다: “내 주위의 모든 사물은 이분화되어 있는데, 고의로 그렇게 되어 있다. 역사도 이분 화되어 있고 문학도 이분화되어 있다. 사람들도 또한 이분화되어 있다.” 그런데, 그녀는 이런 인위적인 이분화가 엄청난 역사적 비극들을 야기시켰으며, 지금도 그러함에 분노한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부분만을 고집하고 옹호하는 사람들, 특히 백인들의 피해자가 흑인이고 여자인 까닭이다. 따라서, 그녀는 작가로서의 사명을 이렇게 천명한다: “어떤 문제에 대한 진실은 이야기의 모든 부분들이 통합되고, 이 모든 부분들의 상이한 의미들이 그 이야기를 새롭게 해줄 때만 밝혀진다고 나는 확신한다. 각자의 작가는 작가의 작품들 중에 빠진 부분들을 써넣는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지는] 전체적인 이야기가 바로 내가 완성하려고 하는 소설이다.”10)

워커가 쓰려고 하는 전체적인 이야기는 삶의 변화와 성숙에 절대로 필요한 더욱더 넓은 시각의 창조이다. 그녀는 그녀의 최대 관심사가 “흑인들의 정신적인 생동, 다시 말하면, 생존의 전체성”11)의 탐구에 있다고 천명한다. 따라서, 그녀는 흑인여자들이 당했던 무자비한 억압과 이로 인한 정신이상을 규명, 고발하며, 흑인남자들에게 바친 헌신적 사랑을 찬미하고 삶에서 거둔 위업들을 예찬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흑인남자작가에게는 부정적인 존재로만 보이기도 한다. 그는 “그들이 조금의 기쁨도 없는 애정 없는 결혼을 하고 반항도 해보지 못한 채 창녀가 되고, 희망과 기대감도 없이 애들만 많이 낳는 어머니가 되는 것을 보았다.”12) 이처럼 편협하고 부정적인 시각을 극복하기 위해, 워커는 그들의 삶의 많은 상반된 사실들을 통합할 수 있는 하나의 철학을 구축하고, 그 철학을 바탕으로 그런 사실들을 통찰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What is always needed in the appreciation of art, or life, is the larger perspective. Connections made, or at least attempted, where none existed before, the straining to encompass in one's glance at the varied world the common thread, the unifying theme through immense diversity, a fearlessness of growth, of search, of looking, that enlarges the private and the public world. And yet, in our particular society, it is the narrowed and narrowing view of life that often wins.13)


워커가 흑인여자들의 삶의 많은 상반된 사실들을 통합할 수 있는 철학은 그 삶의 변화와 성숙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한다. 그녀는 변화의 필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사회는 아주 건전하지도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우리가 그런 사회를 개선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이 변화의 바탕은 환상적인 꿈이나 이원론적 관념론, 정치적 구호, 혹은 경제정책들에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 그 바탕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우리가 느끼고 있는 것, 우리가 삶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에 [있어야만 한다]. 우리 자신의 체험과 삶을 신뢰하면서 어두운(비관적이고 악마적인) 자아와 밝은(낙관적이고 천사적인) 자아를 의식하여 조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14) 이런 바탕을 아는 것 못지 않게, 언제나 자신의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겠다는 확고한 의지와 실천 또한 더욱 중요하다. 삶의 변화를 갈구, 야기시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의식개혁, 그리고 사회개혁에 창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변화에 전혀 무관심한 인간은 꼭두각시나 노예에 불과하다.


I believe in change: change personal, and change in society. I have experienced a revolution (unfinished, without question, but one whose new order is everywhere on view) in the South. I grew―up until I refused to go―in the Methodist Church, which taught me that Paul will sometimes change on the way to Damascus, and that Moses―that beloved old man―went through so many changes he made God mad. So Grange Copeland was expected to change. He was fortunate enough to be touched by love of something beyond himself. Brownfield did not change, because he was not prepared to give his life for anything, or to anything. He was the kind of man who could never understand Jesus . . . except as the white man's tool. He could find nothing of value within himself and he did not have the courage to imagine a life without the existence of white people to act as a foil. To become what he hated was his inevitable destiny.15)


워커가 추구하는 삶의 변화와 성숙은 오로지 자기앎에만 의존한다. 더욱이, 이런 변화와 성숙을 유발, 촉진시키는 소설을 창작하는 그녀의 소설 주제는 오직 자아 탐구와 실현에 대한 궁리이다. 이처럼 자기 삶의 문제에 대해 지나치게 자신에게만 의존할 때, 유아론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녀는 이런 함정을 피하기 위해, 투철한 역사의식과 공고한 공동체의식의 확장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므로, 자신이 추구하는 자기앎과 소설창작은 역사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이렇게 천명한다: “소설가로서의 나의 전체적인 계획과 목표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일이다. . . . 나는 역사에 강한 집착과 애정 그리고 언제나 역사를 상기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가장 가공하고 경계해야 할 사실들 중의 하나는 얼마나 많은 과거, 특히 우리(흑인들)의 얼마나 많은 과거가 망각되어 가고 있는가를 외면하는 현실이다.”16) 게다가, 항시 자신의 삶 속에서 선인들의 삶의 자취를 느끼려 함을 통해, 강한 연대의식에서 솟아나오는 기쁨과 활력을 만끽할 수 있다.


I gathered up the historical and psychological threads of the life my ancestors lived, and in the writing . . . I felt joy and strength and my own continuity. I had that wonderful feeling that writers get sometimes . . . of being with a great many people, ancient spirits, all very happy to see me consulting and acknowledging them, and eager to let me know through the joy of their presence, that indeed, I am not alone.17)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흑인여자들이 당했던 인종과 성 차별의 가혹한 억압과 질곡의 실상들, 이런 극한상황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반항정신과 개혁의지 그리고 그 실천운동의 양상들, 그리고 자아탐구와 그 탐구를 바탕으로 탄생시킨 자립정신이 충만한 새로운 여인상을 고찰한다. 워커가 소설의 여자주인공들을 이처럼 화려하게 변신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의 규명과 그 역할에 고찰의 초점이 놓인다. 그 원동력은 그녀의 소설주제로서의 자아탐구, 고의로 이분화되어진 문학과 역사의 극복, 그 극복을 통한 전인적인 인간의 탄생, 그리고 새로운 인간의 탄생에 필수적인 투철한 역사의식과 공고한 공동체의식이다. 먼저 그레인쥐 코우플런드의 제 3의 인생 에 서술되어 있는 여자주인공들의 억압의 실상들 그리고 변화 욕구와 반항정신의 진면목을 살펴본다.



워커는 그레인쥐 코우플런드의 제 3의 인생 에서 1900년대 초기부터 1960년대까지 사이에 살아가는 세 여자주인공들의 억압과 좌절, 그리고 자유와 희망이 공존하는 삶을 통해서, 흑인여자들의 이상과 현실의 극단적인 괴리를 사실주의 수법으로 탁월하게 묘사, 제시한다. 이 소설은 표면상으로는 그레인쥐 코우플런드와 그의 아들 브라운필드(Brownfield)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들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여자들과 그녀들의 운명을 다루고 있다.18) 워커는 흑인여자들 또한 자신만의 자유스럽고 창조적인 생활, 그리고 자기 삶에 사랑과 생동감을 충만시켜주는 남자를 갈망하는 선천적이고 본능적인 삶의 이상을 품고 있다고 천명한다. 그러나 그녀들의 삶의 현실은 그런 이상과는 이렇게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흑인여자들은 . . . 사회와 가정이 [가차없이] 짓누르는 엄청나게 무거운 짐들을 지고 있는 ‘노새들’이다. 그들은 인종적 그리고 성적 억압의 피해자들이다.”19) 워커는 이 소설에서 여자주인공들이 겪어야만 하는 억압과 좌절의 양상들을 묘사하고, 어떻게 이로부터의 해방과 자유스럽고 창조적인 새로운 삶이 가능할 수 있는가를 제시한다.


The process of cyclical movement in the lives of Walker's black women is first evident in her first novel, The Third Life of Grange Copeland. The girl, Ruth, is daughter of Mem Copeland and the granddaughter of Margaret Copeland―two women whose lives were lived out under the most extreme forms of oppression. Under the pressure of poverty and alienation from her husband, Margaret kills herself and her child; and Mem, wife of Brownfield Copeland, is brutally murdered by her husband in one of his drunken rages. Ruth is brought up by her grandfather, Grange, who in his "third life" attempts to salvage some of his own wasted life by protecting Ruth. Ruth emerges into a young woman at the same time as the civil rights movement, and there is just a glimpse at the end of the novel of how that movement will affect Ruth's life. We see her becoming aware, by watching the civil rights activists―both women and men―that it is possible to struggle against the abuses of oppression. Raised in the sixties, Ruth is the natural inheritor of the changes in a new order, struggling to be, this marking the transition of the women in her family from death to life.20)


이런 억압의 가장 대표적인 피해자가 그레인쥐의 부인 마거리트이다. 그녀가 이런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요인은 자기주장을 전혀 하지 않고 할 수도 없으며, 자기와 자기 삶을 독자적으로 탐구해 보려는 관심과 의지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 남편에게 순종하는, 마치 그의 강아지와 같은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레인쥐의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한다. 그는 백인위주사회에서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한 소작인으로서, 끊임없는 정치적 억압, 사회적 차별, 그리고 경제적 착취를 당하면서, 진실한 자아와 도덕적 책임감의 의식이 불가능한 인간으로 타락해 버린다. 따라서, 그는 부인과 아들을 사랑과 애정 그리고 경제적 자립으로 보살피는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그들을 학대하고 억압하는 폭군으로 전락한다. 그는 백인들 앞에서 자신을 마치 “하나의 돌조각이나 일종의 로보트”21)로 왜소화시킬 수밖에 없으며, 그 왜소화의 정도에 비례하는 분노와 울분을 부인과 아들을 향한 폭력으로 터뜨린다. 그는 백인사회의 횡포 때문에, 자기가 가장 사랑해야 할 부인과 아들을 학대함에서 삶의 희열과 의미를 찾는 짐승 같은 인간으로 자기도 모르게 돌변한다.


The American social structure turns Black man into a beast―suppressing his human qualities and accenting his animal tendencies. The Black man, in turn, reflects his violent relation with his white landowner in his relations with his wife and son. He takes his anger and frustration out, not on the social system or the people who exercise its power but on his children and on the black woman, who, as he does in the master-servant relation, remains loyal and submissive.22)


게다가,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인종차별과 경제적 착취라는 불가항력으로 삶의 무능력자가 되는 남편 때문에, 마거리트는 본의 아니게 소생이 불가능한 피해자로 전락한다. 그녀의 갈색피부는 크림처럼 부드럽고, 언제나 향기를 내뿜는다. 치아는 작지만 고르며, 몸매는 유연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강한 힘을 내비친다. 그녀는 이렇게 축복 받을 만한 여인이지만, 피부로 의식되는 극빈과 중노동의 과로는 그녀의 영혼과 육체를 멍들게 한다. 그러나 그레인쥐는 그녀에게 어떤 위안과 도움도 될 수 없으며, 어려운 현실을 솔직하게 일러주지도 못한다. 더욱이, 그는 그녀에게 이런 말을 차마 털어놓을 수 없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황홀경이 아닌 불안감으로 [치닫고 있다]. 자유가 아닌 굴레로. 영원한 사랑이 아닌 깊은 절망으로”(247).

더욱이, 마거리트는 무능력자로 전락한 남편의 관능적 쾌락추구 때문에, 공포감과 불륜을 겪게 된다. 토요일마다 그레인쥐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되어, 그녀와 아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하며, 비틀거리면서도 마구 총을 쏜다. 그러면, 그녀는 허겁지겁 아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도망쳐가 숨는다. 또, 그는 왕성한 성욕을 충족시켜 줄 젊은 여자가 “자존심과 사나이답다는 감정을 갖기 위해서 필요하다”(248)는 궤변을 서슴없이 늘어놓는다. 그의 이런 엉뚱한 강박관념은 그녀를 부정한 여자로 타락시키고, 많은 남자들의 농락상대로 비하시킨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레인쥐, 나를 구해줘요! 그레인쥐, 나를 도와줘요!”(250)하고 외치지만, 후에는 거침없는 불륜관계를 가지면서, 사내아이까지 출산하게 된다. 새벽 무렵에 집에 돌아오는 어머니를 보고서, 아들이 민망해 함도 모르는 채, 그녀는 집을 향해 이렇게 걸어간다: “그녀는 신을 벗어 손에 들고, 이슬로 젖은 길을 조심스럽게 무거운 마음으로 걸어간다. 그녀는 땅을 응시하는 데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아들과 부딪히기 직전까지 그를 보지 못한다”(20).

그러나, 불륜관계가 끝나고 조용히 혼자 있을 때, 그녀의 눈빛은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으로 가득차 있다. 그녀는 주부로서 남편을 위해 성심성의를 다하려는 열성이 대단하다. 그녀는 들에서 캔 푸성귀와 덫으로 잡은 짐승들로 남편을 위해 음식을 만드는 데에, 또 거친 세파 속에서도 남편의 기분을 흐뭇하게 해주려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 게다가, 남편에게 언제나 순정하며, 불륜의 아이를 가진 것을 몹시 후회한다. 그녀는 그레인쥐로부터 떨어진 자기 삶을 살 수 없다. 따라서,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부채 때문에 자기와 아들을 버리고 남편이 도망치자, 그녀는 “그가 이번에는 정말로 떠나버렸음을 알아차린다. 그녀는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으므로, 먼저 불륜관계에서 생긴 아들을 살해하고서, 자살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레인쥐를 극진히 사랑했으므로 그가 없는 삶을 살 수 없으며, 또한 자기가 저지른 불륜의 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23) 요컨대, 인종적 그리고 성적 억압 때문에, 마거리트의 순박하고 진실하며 헌신적인 삶은 이렇게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억압과 좌절의 또다른 대표적 피해자인 마거리트의 며느리 멤은 비극적인 실존상황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려고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숭고한 의지는 남편 브라운필드의 의지박약, 무능, 아집, 편견, 비정, 그리고 비열함 때문에 무산되어 버린다. 그는 열여섯살 때 아버지가 떠나 버리고, 어머니마저 자살해 버리자, 갑자기 고아 아닌 고아의 고독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 순간, 그는 큰 도시에서 새로운 자기와 새로운 삶을 창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강한 실천의지를 결핍한 그는 “자신을 일신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고정불변의식이 그가 지금 가진 것의 전부인 까닭이다. 그는 사랑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없다. . . . 자신의 삶만을 본보기로 삼는 천성 때문에, 그는 자식들을 위한 더욱 향상된 삶의 가능성을 부인한다”(315). 더욱이, 그는 사랑결핍증과 백인공포증의 노예로서, 비정하고 잔인한 인간이다.

멤의 억압, 특히 실의와 좌절의 고통은 브라운필드와의 결혼에서 싹튼다. 아버지의 버림을 받아 혼자 남았을 때, 그는 독립된 인간이 되기 위해, 엄청난 부채의 압력으로 아버지를 삶과 가정의 무능력자로 만들어버린 백인지주의 농토를 등진다. 그러나, 그는 큰 도시에서 새로운 자유를 향유하겠다는 큰 꿈을 버리고, 두 여자의 성욕을 충족시켜 주는 하수인으로 정착하여 살아간다. 그렇게 2년을 보낸 후, 그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음을 깨닫고, 학교선생인 멤을 만나 결혼하여, 백인의 소작인이 된다. 그는 신혼생활의 꿈에 부푼 채 사랑에 가득찬 황홀한 눈빛으로 미소짓는 그녀에게 이런 약속을 한다: “여보, 우리는 여기서 오래 살게 되지는 않을 거요. 걱정하지 말아요”(71).

그러나, 멤의 비극적인 삶의 씨앗은 이 농토에서 싹튼다. 브라운필드는 열심히 농사를 짓지만, 부채는 계속 눈덩이처럼 늘어난다. 그는 호구책으로 다섯 살 난 딸에게 목화 따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고, 자신 또한 아버지의 노예적인 삶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작은 다리에 피멍이 들고, 독기운 때문에 큰 눈이 충혈되며, 옷은 땀에 흠뻑 젖고, 고약한 냄새 때문에 호흡장애로 고통당하다가, 해질녁에는 완전히 지쳐서 떨고 있는 딸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 마음이 괴로워 죽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힐 뿐이다. 그렇지만, 멤이 그의 곁에 있기에, 그는 온갖 고통과 고난을 참고 견딜 수 있다. 멤은 그의 쓰라린 삶에 활력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유일한 원천이다. 그녀가 그의 비참한 삶의 수호신이다.


Three years later when he was working the same farm and in debt up to his hatbrim and Mem was big with their second child, he could still look back on their wedding day as the pinnacle of his achievement in extricating himself from evil and the devil and aligning himself with love. Even the shadow of eternal bondage, which plagued him constantly those first years, could not destroy his faith in a choice well made. For Mem was the kind of woman who sang while she cooked breakfast in the morning and sang when getting ready for bed at night. And sang when she nursed her babies, and sang to him when he crawled in weariness and dejection into the warm life-giving circle of her breast. He did not care what anybody thought about it, but she was so good to him, so much what he needed, that her body became her shrine and he kissed it endlessly, shamelessly, lovingly, and celebrated its magic with flowers and dancing; and, as the babies, knowing their places beside her as well as life, sucked and nursed at her bosom, so did he, and grew big and grew firm with love, and grew strong.  (72-73)


그러나, 그녀는 점차 사회제도와 경제적 착취에서 비롯된 남편의 무능력과 무력감 때문에, 그의 열렬한 사랑의 대상에서 비난, 학대, 그리고 저주의 천덕꾸러기로 뒤바뀐다. 그는 백인농장에서의 빈곤과 부채의 무거운 압력과 억압에 짓눌려, 더 이상 가족들을 보살피는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없으므로, 자신의 무능과 무력함을 이렇게 개탄한다: “그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찮음과 끝없는 무력감, 그리고 거인들의 세계에서 난장이가 겪는 좌절감을 느낀다”(311). 이렇게 상처받은 자존심과 분열된 자아는 그를 관능적 쾌락추구자로만 치닫게 한다. 이제 술과 여자가 그의 삶의 전부이다. 만취의 기세로, 그는 멤을 격렬하게 비난, 저주, 구타한다. 토요일마다 자신의 실패의 모든 책임을 그녀에게 따지려는 듯, 얼굴에 상처를 남기더니, 드디어 이를 하나씩 부러뜨린다. 그의 이런 만행이 스스로 좌절되어 무력감에 빠져버린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삶을 지탱시켜 주는 활력소 역할을 하는 셈이다.

멤의 진정한 아픔과 고통은 이런 비난, 저주, 구타, 그리고 상처가 아닌 삶에 대한 아름다운 꿈과 그 실현을 방해, 저지하는 백인 농장주의 횡포, 그리고 남편의 편협과 옹고집이 초래하는 실의와 좌절에 있다. 횡포에 속수무책인 그녀는 농장주의 변덕에 따라, 어느 때고 아무런 준비나 대책 없이 이사를 해야만 한다. 그럴 때마다, 동물의 배설물로 가득 찼던 폐가를 사람이 거처할 수 있는 집과 꽃밭으로 아름답게 가꾸는데 소모된 그녀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변해 버린다. 따라서 그녀는 제정신을 잃고, 절망감과 공포심에 사로잡혀, 바보스러워져 상식과 이성을 잃는다. 그녀는 점점 증오심에 가득찬 비정한 여인으로 전락해 간다.


Being forced to move from one sharecropper's cabin to another was something she hated. She hated the arrogance of the white men who put them out, for one reason or another, without warning or explanation. She hated leaving a home she'd already made and fixed up with her own hands. She hated leaving her flowers, which she always planted whenever she got her hands on flower seeds. Each time she stepped into a new place, with its new, and usually bigger rat holes, she wept. Each time she had to clean cow manure out of a room to make it habitable for her children, she looked as if she had been dealt a death blow. Each time she was forced to live in a house that was enclosed in a pasture with cows and animals eager to eat her flowers before they were planted, she became like a woman walking through a dream, but a woman who had forgotten what it is to wake up. She slogged along, ploddingly, like a cow herself, for the sake of the children. Her mildness became stupor; then her stupor became horror, desolation and, at last, hatred.  (84-85)


멤은 그런 횡포에 시달림을 피하기 위해, 월급에서 가능한 최대한도로 저축하면서, 자기 집을 가지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남편은 술에 취하면, 저금을 훔쳐가 엉뚱하게 낭비해 버린다. 게다가, 그에게는 더 좋은 집을 가지려는 생각이 아예 없으므로, 그녀가 딸들과 함께 더 윤택한 삶을 누리기 위해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려는 노력에 적극 반대하며 방해까지 한다. 더욱이, 그는 멤이 구해준 농장일보다 더 편하고 수입도 좋은 공장 일자리마저 그만둔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변명한다; “나도 한 남자이다. 나는 어떤 놈의 공장에서도 일할 의사가 추호도 없다”(123). 이런 악조건과 남편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도, 그녀는 드디어 도시의 편리하고 안락한 집으로 이사하지만, 그의 비열한 음모 때문에 이 집에서도 오래 살지 못하고, 곧 쫓겨난다. 그는 자기의사가 무시, 거역된 이사에 앙심을 품고, 그녀가 계속되는 임신으로 악화된 건강 때문에 실직하여 수입이 없으므로, 새 집의 임대료를 낼 수 없도록 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녀가 그 집에서 살 수 없도록 복수한다.


What a sly and triumphant joy he felt when she could no longer keep her job. She was ill; the two pregnancies he forced on her in the new house, although they did not bear live fruit, almost completely destroyed what was left of her health. Yet, how sad he was somewhere inside that he should still be strong and free to rove about while she spent so much time nursing her feet, attending her children's colds, trying to reassure them they would not have to move back to the country because she could still find work in town. But it was hopeless, her dream for herself and for them was slipping away. She had tried so hard, and even her husband, she thought, had started to respect her again. She didn't ask herself if she loved him. They were at a kind of peace; in the house in town he no longer struck her. The children went to school with happy faces. The baby was trained on an indoor commode.

All of her confidence wore away with her health as Brownfield watched, gloating and waiting. She could not believe he had planned it. She thought he had behaved well, considering everything, which was what he wanted her to think, until he was ready to reveal the plot to her. And then there came the day when she could not even get out of bed to look for work.  (147-48)



이렇게, 남편의 비열한 복수심 때문에 아름다운 꿈의 실현이 무산되어 버리자, 그녀는 극심한 좌절의 고통에 휩싸인다. 그녀에게는 그 고통과 남편의 치졸한 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

더욱이, 남편의 복수로 낳게 된 아들이 피부색소결핍증(albino)에 걸려 하얀 피부를 갖고 태어나자, 그는 아들이 분명히 자기를 닮았음을 알면서도, 그녀가 백인과 관계를 가진 부정한 여인이라고 비난하면서, 산모를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더구나, 그녀는 남편이 정월의 꽁꽁 언 추운 밤에 바깥 계단에 몰래 내놓아 동사시킨 3개월 된 아들을 쓰다듬으며 비탄에 잠겨야 한다. 남편이 자존심을 갖고 “집에서 남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122) 살아온 그녀는 서른 살도 되기 전에 통통하고 예쁜 여인에서 늙고 앙상한 아줌마로 변했고, 풍만했던 유방은 작아졌으며, 까맣던 머리는 은발이 되어 빠진다. 한 겨울에도 종이 뭉치로 막아야 할만큼 바닥에 큰 구멍이 난 신발을 신어야 하고, 남편이 좌절감과 분노 그리고 그에 따른 화풀이를 어머니처럼 받아들이고 달래주었다. 이렇게 살신성인의 삶을 살려고 몸부림쳤던 그녀는 술취한 남편이 쏜 총탄에 명중되어 숨을 거둔다. 그녀의 삶은 그야말로 하나의 커다란 반어(irony)이다.

마거리트와 멤은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어떤 비난, 저주, 고난, 그리고 희생도 감수한다. 그들은 가장 많은 사랑과 존경 그리고 찬양을 받아야 할 여인들이다. 이런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가장 혹독한 억압과 좌절의 피해자로 전락되어야만 하는가? 그들은 자기를 알고 탐구하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에,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자아와 자기 정의를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독자적으로 정의한 삶의 가치와 기준이 없는, 전적으로 남자에게 의존한 삶을 살수밖에 없다. 그들은 남성 위주의 사회가 자신들에게 강요하는 침묵, 순결, 순종, 고난의 감수, 그리고 인내에 무조건 맹종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자기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비극적인 삶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인식, 개선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 잘못으로 간주하거나 운명으로 체념해 버린다. 게다가, 그들은 인종 차별의 극심한 억압의 피해자인 남편의 울분과 분노의 폭발 대상이므로, 더욱더 혹독한 억압과 학대를 받았다. 더욱이, 그들은 자아의식과 자기가능성의 확대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남성들의 편협과 옹고집 때문에, 극도의 실망과 좌절감의 늪에 빠져야 했다.

그렇지만, 워커는 영혼의 성스러움과 사랑 그리고 책임감을 바탕으로 우리 모두의 의식변화와 성숙을 통해, 그런 억압과 좌절 그리고 이런 부정적 요인의 근원인 인종차별과 남성 우월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녀는 이 확신의 실례로 마거리트와 멤의 억압과 좌절로 얼룩진 비극적인 삶을 극복하는 멤의 딸 루스를 창조한다. 루스는 마거리트와 멤의 부정적인 삶과 어두운 과거를 극복하고 머리디언 아가씨 의 주인공, 머리디언 힐의 긍정적이고 전인적인 삶과 밝은 미래로 통하는 교량역할을 한다.24) 그녀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은 투철한 자아탐구 정신과 자기세계 창조의 확고한 의지 그리고 할아버지 그레인쥐의 고귀한 사명과 교육에 있다. 이제 그레인쥐는 과거의 비정하고, 무책임하며, 관능적 쾌락 추구에만 탐닉하던 인간이 아니다. 그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 인종 차별의 가혹한 억압과 착취 그리고 불평등으로부터 해방되어 “다시 태어난 인간”(223)으로서, 변화와 성숙, 자립, 사랑, 그리고 이타주의 정신을 실천하는 인간이다. 다시 말하면, 억압에 짓눌려 술주정과 행패를 부리고, 사랑과 자립정신을 모르며, 의기소침하여 자기주장을 못하고, 독자적인 자기세계를 창조할 수 없는 자기 중심적인 인간으로부터 탈바꿈하여, 인간과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 그리고 자립과 봉사 정신으로 가득찬, 자기 주장을 주장, 실천하는 영감이며 농장주인이다.

루스의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극심한 억압과 좌절의 고통이 없는 희망과 가능성의 세계, 그리고 그 세계의 지속적인 확장에 있다. 이 특징은 마거리트와 멤의 삶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격세지감을 자아내는 엄청난 변화이다. 이런 변화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 이 변화의 근원은 자기 과거를 깊이 반성하면서 자신의 영혼과 책임감을 절대시하려고 고심하는 그레인쥐의 획기적인 의식 개혁과 고귀한 사명감에 있다. 지금의 그는 변화의 필연성을 이렇게 주장한다: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 . . . 내가 아는 한 사람들도 변화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에게 희망을 갖는다”(274). 게다가, 그의 삶의 주요 목적은 루스를 이렇게 변화, 성숙시키는 데에 있다: “그의 가장 큰 의무는 루스가 어떤 위대한 과업, 정정당당하고 줄기찬 투쟁, 그리고 어둡고 가혹한 현실에 [현명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의 계발과 향상이다”(279).

루스의 삶의 변화와 성숙은 할아버지의 이런 철학 때문에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생존이 전부는 아니다. 그는 살아남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인적인 생존(억압, 좌절, 책임전가, 편견이 없는 영혼의 성스러움과 자아실현에 바탕을 둔 창조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이 그가 루스에게 바라는 욕심이고 희망이다”(298). 그녀는 그녀의 이런 전인적인 생존이 가능하도록, 그녀에게 따뜻한 보살핌과 사랑을 베풀면서 훌륭한 교육을 전수한다. 그는 지식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으므로, 그녀가 대학에 진학할 때, 소요되는 학자금이 들어있는 예금 통장과 현금을 아무도 모르게 마련해 둔다. 게다가, 그는 그녀에게 자동차 운전을 가르쳐, 그녀가 혼자 도시에 가서, 직접 물건을 사면서 백인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자립심과 모험심을 키울 수 있도록 한다. 더욱이, 그는 자기가 살면서 얻은 모든 지식과 체험을 그녀에게 가르쳐 주면서, “네 삶의 목적은 내 것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297)고 흐뭇해한다.

또, 루스는 할아버지로부터 책이 “가르쳐 주지 않은 역사”를 배운다. 그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 무리한 운동을 해서는 안되는 데도 불구하고, 그녀를 위해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를 부르면서 온 힘을 다해 춤을 춘다. 그 노래는 그녀가 과거의 사물들에 친근감을 느끼도록 해주면서, 그녀를 깊이 감동시킨다. 게다가, 춤은 그녀에게 흑인들의 삶의 뿌리와 유산 그리고 가치를 일깨워 주면서, 흑인의 고향 애프리커와 그 곳의 북소리를 들려준다. 춤은 또 그녀가 자신의 육체를 강하게 의식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도, 흑인공동체 의식을 각성시키면서, 시공을 초월한 공고한 연대의식의 확장을 돕는다.


They danced best when they danced alone. And dancing taught Ruth she had a baby. And she could see that her grandfather had one too and she could respect what he was able to do with it. Grange taught her untaught history through his dance; she glimpsed a homeland she had never known and felt the pattering of the drums. Dancing was a warm electricity that stretched, connecting them with other dancers moving across the seas. Through her grandfather's old and beautifully supple limbs she learned how marvelous was the grace with which she moved.  (190)


루스는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과 훌륭한 교육 속에서도, 또한 자신의 상상을 불허하는 그의 백인증오심과 배척주의를 의식한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백인들의 억압과 착취를 당했으며, 그 극심한 피해 때문에 가장의 역할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는 생명을 구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임을 확신하므로, 물에 빠진 백인 여자를 구해주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검둥이”의 손이라고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따라서, 얻어진 백인들에 대한 골수에 사무친 원한과 증오심이 부지부식간에 손녀에게 표출된다. 루스도 6학년 때 백인 학교에서 가져온 역사 교과서에 한 백인 학생이 세계의 여러 인종들을 상술하면서, 흑인에 대해서는 오로지 “검둥이”라고만 써 놓은 것에 극도로 분개하여 교실을 박차고 나와 등교를 거부한다. 이런 여건 가운데서도, 그녀는 이런 세계관을 갖는다: “그녀는 세계가 자기가 가끔 몽상했던 만큼 그렇게 아름답지도, 받아들이려고 단단히 준비했던 만큼 그렇게 견딜 수 없지도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사회가 매우 매혹적인 연구대상, 열광적인 주제, 그리고 감동적인 학교임을 깨달았다”(319).

따라서, 그녀는 백인과 사회에 대해 할아버지의 의견과는 상충되는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분명하게 피력한다. 그는 백인과의 관계에서 소극적이고 도피적인 삶을 택한다. 그는 백인들과 절연하고 이런 폐쇄적인 은둔 생활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곧 자기와 마주치는 모든 백인들과 싸울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싸움에 관심이 없다. 그는 각자가 자신의 최선의 방법으로 자기를 자유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당분간 그는 백인들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하나의 은신처를 찾아, 그들을 인정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면서, 항시 자기 삶을 지키고 보호하여 그들의 침범을 당하지 않도록 대비하고 싶다”(221). 그러나 루스는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을 살고 싶다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은둔자가 되고 싶지 않다. 언젠가 나는 이곳을 떠나, . . . 뉴욕시, 그 대도시의 125가, 무수한 나이트 클럽들, 그리고 공공연히 악담하면서 서성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보려고 한다”(272).

더구나, 루스는 백인위주였던 미국사회도 영혼의 성스러움을 바탕으로 변화, 개혁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필연적으로 흑인들의 생활, 지위, 그리고 인권도 향상된다는 낙관적인 견해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백인들이 인종차별의식과 제도를 철폐하고,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진리를 받아들여, 더 이상 불법과 비행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그들의 과거 만행들을 용서하고 잊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화해 정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또한 민권운동과 흑백통합문제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그 당위성을 역설한다. 반면에, 그레인쥐는 민권운동에 대해 철저한 불신주의자, 냉소주의자, 그리고 비관주의자로서 미국사회의 변화가능성을 결단코 부정한다. 그는 또 흑백통합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고 고집, 맹신한다. 따라서, 그는 백인들에 대한 불신, 배척, 증오의식의 노예로, 그들과 결코 화해할 수 없다.


"Maybe it would be better if something happened to change everything; made everything equal; made us feel at home," said Ruth. 

"They can't undo what they done and we can't forget it or forgive."

"Is it so hard to forgive 'em if they don't do bad things no more?"

"I honestly don't believe they can stop," said Grange. "not as a group anyhow." He lounged back in his chair and stuck a hand in his pocket. "Even if they could," he said slowly, "it'd be too late. I look in my heart for forgiveness and it just ain't there. . . . "  (292)


루스는 열여섯살 때, 텔리비젼을 통해서만 보았던 민권운동 데모를 바로 자기 마을에서 목격한다. 많은 흑백 남녀 젊은이들이 “흑인과 백인들이 다 함께”라는 깃발을 들고서 행진한다. 그녀는 그들의 표정에서 반목, 반감, 증오심, 그리고 적대감 대신 상호 이해와 신뢰, 우정, 친근감, 그리고 공동목표를 읽을 수 있다. 그녀는 데모대가 건네 준 종이 쪽지에서 이런 그림을 본다: “백인 남녀가 한 바위에 쇠사슬에 묶여 있다. ‘인종차별’이라고 지칭된 그 바위 아래에 ‘우리가 자유로워져야, 비로소 당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쓰여 있다”(324-25). 그녀는 또한 젊은 흑인 남녀가 상호존중과 평등을 바탕으로 사랑하는 장면도 본다. 그녀는 이런 흑백과 남녀 사이의 상호 이해와 존중 그리고 평등을 현실화시키려는 많은 젊은이들의 열성과 활동에 여지껏 느껴보지 못한 깊은 감명을 받는다. 그러나, 한편에는 이 젊은이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신, 증오하는 백인들과 같은 많은 흑인들이 있음을 잘 안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 흑인들을 깨우치는 과업에 매진하겠다고 이렇게 선언한다: “나는 일어설 각오가 되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으므로, 내가 먼저 일어나 그들이 나를 따르도록 해야 할 것 같아요”(275-76). 그녀의 이런 과업과 그 매진 그리고 마거리트와 멤의 세대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자기 정의의 정립25)이 이 소설의 핵심주제이며 기본 철학이다. 머리디언 아가씨 그레인쥐 코우플런드의 제 3의 인생 에서 그렇게 강도 높게 역설되었던 삶과 사회의 변화에 가장 이상적이고 필수적인 기본철학을 제시한 소설이다. 워커는 처녀작에서 인종과 성 차별 때문에 흑인여자들이 숙명적으로 겪어야만 했던 혹독한 억압과 좌절의 극심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더욱이 극복해야만 한다는 변화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주장하고, 두 번째 소설에서 그 변화는 반드시 인간의 가장 지대한 관심이 언제나 “개인의 자주성, 자립, 그리고 자아실현”임을 바탕으로 하는 이런 철학―“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가치는 만물과 하나가 되는 완전한 인간성이다”―을 전제로 해야 함을 갈파한다. 따라서, 이 소설의 주인공, 머리디언 힐은 처녀작의 세 여자 주인공, 마거리트, 멤, 그리고 루스의 삶을 통합하면서, 그들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자신의 변화와 성숙에 관한 독자적인 철학과 세계를 창조한다. 특히, 그녀는 루스가 변화에 대해 가진 천진난만하고 관념적인 욕구와 주장이 방향 제시에는 가능하지만, 그 현실적 수용은 불가능함을 너무나 잘 안다. 그녀는 변화와 개혁이 얼마나 어렵고 복잡다단하며 맹목적인가를 실제로 인식, 체험하면서, 자기앎의 정의에 전적으로 의존한 자기성숙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 다른 사람들, 그리고 사회에 가장 이상적이고 실리적인 변화를 초래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회상수법(flashback)으로 쓰여진 머리디언 아가씨 는 구성과 주제에서 처녀작보다 훨씬 더 복잡미묘하다.


All I was thinking of when I wrote Meridian, in terms of structure, was that I wanted one that would continue to be interesting to me. The chronological structure in The Third Life of Grange Copeland was interesting as a one-time shot, since I had never before written a novel. So when I wrote Meridian, I realized that the chronological sequence is not one that permits me the kind of freedom I need in order to create. And I wanted to do something like a crazy quilt, or like Cane [by Jean Toomer]―if you want to be literary―something that works on the mind in different patterns. As for the metaphors and symbols, I suppose, like most writers, I didn't really think of them; they just sort of happened.

You know, there's a lot of difference between a crazy quilt and a patchwork quilt. A patchwork quilt is exactly what the name implies―a quilt made of patches. A crazy quilt, on the other hand, only looks crazy. It is not "patched"; it is planned. A patchwork quilt would perhaps be a good metaphor for capitalism; a crazy quilt is perhaps a metaphor for socialism. A crazy-quilt story is one that can jump back and forth in time, work on many different levels, and one that can include myth. It is generally much more evocative of metaphor and symbolism than a novel that is chronological in structure, or one devoted, more or less, to rigorous realism, as is The Third Life of Grange Copeland.26)


머리디언 힐은 끊임없이 자기변화와 성숙을 도모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성스럽게 하고 있는 여자”27)이다. 그녀는 인종과 성 차별의 억압, 개인의 성스러운 영혼과 숭고한 의지를 약화, 말살시키려는 집단의 편견과 강요, 남편과 애인의 배신, 그리고 자신의 일방적인 목적에 급급하여 어머니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포기한데 대한 자책감의 극심한 고통과 좌절로 만신창이가 된 삶을 살아야만 했지만, 자기앎, 정의, 그리고 책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의 이런 삶의 의지와 결실이 사회와 의식의 변화와 개혁에 창조적인 기여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런 생활철학 때문에, 그녀는 언제나 “왜소함과 거대함, 과거와 현재, 그리고 비통과 황홀을 동시에 지각”할 수 있으며, “자기는 결코 소외된 외로운 존재가 아님을 확신한다”(93-94). 따라서, 그녀는 자기본능과 의지에 전적으로 상반되는 억압적인 삶의 여건 가운데서도, 이의 극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주는 두 개의 활력소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마비(paralysis)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변화와 성숙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자발적인 공감에 따라 긍정, 수용되어지는 비폭력민권 운동의 실천철학이다. 그녀는 가끔 마비로 일어나는 망각으로 말미암아 억압적이고 부정적인 삶에서 해방될 수 있다. 또 실천철학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하면서, 그들과 공고한 유대관계를 맺으므로, 자연히 존경과 사랑의 대상으로서 그들을 자연스럽게 일깨울 수 있다.

이 소설은 대머리를 감추려고 차양 있는 모자를 쓴 허름한 옷차림의 머리디언이 흑인학생들을 이끌고 흑백분리주의를 항의하는 비폭력시위를 벌이고 있는 조지어주의 조그마한 도시에 트루먼 헬드(Truman Held)가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그는 한때 민권운동의 동지였지만, 오래 전 그 운동을 포기하고 뉴욕시(New York City)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화가이다. 그는 흑인들의 삶과 문화에는 무관심인, 프랑스 문화에 매혹된 감상적이고 맹목적인 민권운동가였다. 게다가, 흑인 여자는 추하고 편협하며 열등한 데에 비해 백인 여자는 아름답고 지적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연인이었던 머리디언을 버리고 백인여자와 결혼한 배신자이다. 그러나, 그는 무수한 흑인 여자들을 화폭에 그리면서, “그들의 아름다움과 위대성”(169)을 새롭게 인식한다. 더욱이, 머리디언의 소유에 관심이 없는 검소하고 진실한 생활, 공동체적인 삶, 그리고 비폭력 민권운동의 실천철학과 그 놀라운 효과에 깊은 감명과 영향을 받아, 자신의 일방적이고 편협한 의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책임과 사명감을 깨닫는다. 그녀가 그 도시를 떠나게 될 때, 그는 그녀의 후계자 역할을 하려고 하는데, 그의 이런 새로운 삶의 결의와 시작이 이 소설의 끝이다.

머리디언은 지금 자신의 신체적 건강을 악화시킨 인종차별과 용감무쌍하게 싸우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야위어 까칠하고, 피부는 햇볕에 너무 타서 누르스름하며, 이마와 아래턱은 여드름 투성이고, 눈빛은 흐릿하여 총기가 없어서 마치 초점이 없는 것 같다”(24). 그렇지만, 그녀는 비폭력 민권 운동을 통해 인종차별의 벽을 무너뜨리는 데에 점차 성공하면서, 건강도 회복되고 빠졌던 머리도 다시 돋아난다. 그녀는 플래스틱으로 만든 모조인간이 세계의 열 두개 기적들 중의 하나로 죽은지 25년이 지났으나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상태로 보존된 여인이라고 선전하는 백인 서커스단의 속임수에 흑인들이 속지 않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면서, 흑인들은 목요일에만 구경할 수 있다는 흑백분리주의에 격렬하게 반항한다. 그 모조인간을 실은 서커스 자동차를 보호하기 위해, 경찰관들은 그녀에게 총구를 겨냥하고, 평등권을 주장하는 흑인 소요와 폭동에 대비하여 그 도시의 백인들이 1960년대에 구입한 탱크로 방어선을 구축한다. 그러나, 그녀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면서 흑인 학생들을 이끌고 이 저지선을 돌파하여, 그 자동차 앞까지 오는 데에 성공한다. 이 앞에서, 그녀가 마비로 졸도하자, 네 남자가 조심스럽게 정중하게 그녀를 어깨에 메고 간다. 이렇게 헌신적으로, 그녀는 흑인들이 백인사회의 횡포와 억압을 직접 깨닫도록 하면서, 무작정 좌절과 절망감에 빠져 체념하기보다는, 주권 행사를 통한 삶과 사회의 건설적 변화를 깨우쳐 주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지금부터 머리디언이 겪는 삶의 억압과 좌절 그리고 그 극복과정을 고찰해 본다. 그녀는 고등학교 재학 중에 임신하여, 퇴학당하고 결혼하여 어머니가 된다. 식당에서 일하는 학생 남편은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배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졸업에만 관심을 갖는 세속적인 인간으로서 곧 아내와 아들을 버린다. 그녀는 배신당한 아픔을 달래려고 거리를 거닐다가 어느 집 텔리비젼 화면에서 흑인들의 투표자 등록 운동이 이 집에서 전개된다는 뉴스를 본다. 지금까지 흑인들의 파렴치한 범죄만을 보도하던 텔리비젼에서, 처음으로 색다른 뉴스를 보면서 그 내용은 잘 모르지만 사회의 큰 변화를 실감한다. 그러나, 그 다음날 새벽에 흑인들의 참정권을 결사반대하는 백인들에 의해 그 집이 폭파당해 버린 것을 목격한다. 1960년 4월 중순 어느 날의 이 사건으로 열입곱살인 그녀는 “더 큰 세계(미국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알게 되자,”(73) 자발적으로 민권운동에 동참하여 북부에서 온 트루먼 헬드를 만난다.

그녀는 민권운동의 앞날이 얼마나 험악하고 험난할 것인가를 직접 체험한다. 병원의 흑백분리 시설에 항의하는 심야 촛불행진에 참가했다가, 무자비한 폭행과 구타를 당하고, 또다른 시위에서는 경찰이 쏜 최루탄 때문에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심한 통증으로 고통당한다. 이제서야 시위에 가담했던 민권운동가들이 왜 절뚝거리며 걷는지, 왜 그들의 눈이 붓고 충혈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체험을 계기로, 그녀는 백인과격분자들이 흑인들의 정당한 요구와 권리 그리고 인권을 유린, 탄압함에 못지 않게, 백인 위주의 미국정부 또한 그들의 억압에 앞장서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녀 자신도 한 백인이 아닌 미국정부의 군인과 경찰의 집단적인 만행과 탄압의 억울한 피해자가 된다.


As soon as this line was out of sight, the troopers turned on them, beating and swinging with their bludgeons. One blow knocked Meridian to the ground, where she was tramped by people running back and forth over her. Bur there was nowhere to run. Only the jail door was open and unobstructed. Within minutes they had been beaten inside, where the sheriff and his deputies waited to finish them. And she realized why Truman was limping. When the sheriff grabbed her by the hair and someone else began punching her and kicking her in the back, she did not even scream, except very intensely in her own mind, and the scream was Truman's name. And what she meant by it was not even that she was in love with him: What she meant by it was that they were at a time and a place in History that forced the trivial to fall away―and they were absolutely together.  (84)


머리디언의 삶의 고통과 좌절은 인종주의자들과 미국정부의 탄압보다는 흑인집단과 개개인의 편견과 편협에서 비롯되는 일방적인 강요 때문에 배가된다. 그녀는 미국정부가 과격하고 폭력적으로 민권운동을 탄압함에 대응하는 가장 현명하고 이상적인 방법은 흑백간의 극한 대결이 아니라, 흑인들이 박탈당했던 투표권을 되찾아 행사함에 있음을, 투표를 통하여 그들의 삶과 사회가 변화될 수 있다는 의식개혁이 선행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과격행동이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고 싶어하는”(188) 흑인들의 가르침과 깨우침에서 백인위주의 미국사회의 변화와 개혁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삶과 사회의 변화를 초래하는 가장 창조적인 방법은 교육을 통한 개개인의 의식개혁, 성숙, 그리고 자기앎과 정의의 확장에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그녀의 혁명동지들인 학생과 지식인들은 흑인들의 삶과 인권의 향상이라는 미명하에 자기들의 일방적 목적달성에만 급급하고 열중한다. 전적으로 과격한 방법에만 의존하여 사회변화와 폭력적인 미국정부에 대응하려는 그들은 그녀에게 혁명을 위해 살인도 불사함을 맹세하는 선서를 강요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인간성과 개체성을 부정, 억압하는 이런 강요를 용납할 수 없다. 그녀는 10년 전에 뉴욕시에서 일어난 곤혹스러운 장면을 회상한다.


And Meridian had sat among them on the floor, her hands clasping the insides of her sneakers, her head down. To join this group she must make a declaration of her willingness to die for the Revolution, which she had done. She must also answer the question "Will you kill for the Revolution?" with a positive Yes. This, however, her tongue could not manage. Through her mind was running a small voice that screamed: "Something's missing in me. Something's missing!" And the voice made her heart pound and her ears roar. "Something the old folks with their hymns and proverbs forgot to put in! What is it? What? What?"

"Why don't you say something?" Anne-Marion's voice, angry and with the undisguised urgency of her contempt, attempted to suppress any tone of compassion. Anne-Marion had said, "Yes, I will kill for the Revolution" without a stammer; yet Meridian knew her tenderness, a vegetarian because she loved the eyes of cows.  (27)


게다가, 머리디언은 대학의 예배규정을 어기고,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가 사악하고 방자한 학생이라는 매도를 당한다. 매일 오전 8시에 색슨(Saxon) 대학의 모든 학생이 참석해야만 하는 예배에서 학생들은 차례대로 연단에 올라가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 곁으로 온 자기체험을 고백해야 한다. 그런데, 머리디언은 “자기가 뿌리쳤던 어떤 유혹도 기억할 수 없고, 유혹을 물리친 여부를 떠나서 자기가 하느님 가까이 있다고는 믿지 않으며, 사실 자기는 하느님의 존재도 믿지 않는다”(94)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녀의 진솔한 말은 다른 학생들과 교수들의 격렬한 비난과 매도의 대상이 된다. 또 그녀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하라는 어머니의 강권을 거역했다가 어머니의 사랑도 잃게 된다: “그녀는 어머니의 손을 붙잡아 자기 손으로 감쌌다가 자기 입술로 가져오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분노와 슬픔의 눈물로 얼굴을 적시면서 손을 뿌리쳤다. 어머니의 사랑은 사라져 버렸다. 그 사랑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충족되어야 할 조건들이 있었다. 머리디언은 그 조건들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었다”(30). 그녀의 순수한 영혼은 어머니의 억압과 증오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이렇게 참혹하고 비참한 억압의 극심한 고통과 함께, 연인의 배신이 남긴 쓰라린 상처와 아픔을 참아야 한다. 남편의 버림을 받았던 머리디언은 여대생으로서 자신의 이상적인 남성인 트루먼 헬드를 열렬하게 사랑한다. 그녀에게 그는 경탄, 존경, 숭배, 그리고 매혹의 대상이다.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솟아나온 어떤 활력이 육체에 요동치면서 전신으로 퍼져감을 실감한다. 마치 자기 몸의 중심이 무너지기 시작함을, 또 자신의 육체가 그의 흡인력에 끌려들고 있음을 의식한다. 그에 대한 사랑의 일념 때문에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는 중에도, 잃어버리고 빼앗겨버린 감정을 되찾았다는 안도감과 희열을 만끽한다.


She loved being with Truman. She felt protected when she was with him. To her he was courageous and "new." He was, in any case, unlike any other black man she had known. He was a man who fought against obstacles, a man who could become anything, a man whose very words were unintelligible without considerable thought. She also wanted to make hot, quick, mindless love with him whenever he was near. When he touched her now, on the arms where they joined her shoulders, she trembled against him, faint with desire, as the description read in old novels. She had never felt faint with desire before and felt she had discovered a missing sense.  (100)


그러나, 그는 그녀가 자신의 삶에 활력과 목적의식을 충만시켜 준다고 호언하면서도, 순결을 상실했다며 임신한 그녀를 버린다. 그의 눈에는 “결혼했어야 했지만 하지 않았던”(140) 그녀보다도 백인여자가 더 아름답고 지적으로 비친다. 결국, 그는 백인여자와 결혼한다.

그러면, 머리디언은 어떻게 억압과 좌절로 얼룩진 비극적인 삶으로부터 해방되는가? 그녀는 너무나 비참하고 억압적, 노예적, 그리고 숙명적이었던 자기 어머니의 삶을 잘 안다. 어머니는 풍부한 창의력을 지녔지만, “그 표현이 허용되지 않았다”(51). 어머니는 결혼 후에 비로소 흑인여자들의 비참한 삶을 이렇게 이해했다: “그녀가 흑인여자들에게 은밀한 기쁨을 준다고 상상했던 신비스러운 정신적인 삶이란 자식들을 위해 살고 있을 뿐 자기들은 이미 죽은 존재임을 완벽하게 앎에 지나지 않았다”(51). 어머니도 그러한 삶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렇게 울부짖었다: “나는 한명의 아이도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여섯 아이를 낳아 손수 다 키웠다”(90). 반면에, 머리디언은 어머니와 같은 노예적이고 숙명적인 삶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몸부림친다. 그녀는 임신하여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했지만, 현저히 높은 지능지수 때문에 색슨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는다. 그녀는 “괴물”(89)이라는 어머니의 힐난 속에서도, 대학진학을 위해 어머니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가볍게 포기하고, 아버지의 버림을 받았던 아들을 또다시 버린다.

혼자서 아들을 훌륭하게 키울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를 버림이 곧 그의 주제라고 안도했었다. 그러나, 곧 아들에 대한 악몽과 “그녀의 삶―전 세대에서 [당연히] 준수되었던 모성애의 기준에 순응할 수 없는 삶을 저주하는 양심의 소리”(91)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당한다. 가혹한 자책감 때문에 한달 동안 식사도 할 수 없어 극도로 쇠약해진 몸으로 허둥거리고, 가끔은 기진맥진해서 혼수상태에 빠진다. 꿈 속에서, 함께 배를 탔던 어머니가 바다로 떨어지는 그녀를 붙잡아주고 있었다. 온갖 위험 속에서도, 어머니는 그녀를 꼭 붙들고 있었다. 그녀가 “엄마, 나는 엄마를 사랑해요”라고 속삭이자, 어머니를 대신해 윈터(Winter) 교수가 “베개 위에 있는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본능적으로 마치 머리디언이 자기 자식인 것처럼 ‘나는 너를 용서한다’”(125)고 응답해 준다. 드디어, 학교당국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고집스럽게 재즈, 블루스, 그리고 흑인영가를 가르치는 윈터교수에게서,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받을 수 없었던 용서를 받는다.

그녀가 자책감으로 말미암아 혼수상태에 빠졌음과 잘못에 대한 용서를 받았음은 그녀의 변신과 성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혼수상태는 비극적인 과거의 망각을, 그리고 용서는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재생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 상징은 공동체의 존재 목적은 전체의 파손을 막는 데에, 다시 말하면, 전체의 보존에 있음을, 그러므로 삶과 사회의 변화도 가능한 한 공동체의 사분오열을 막는 철학을 바탕으로 초래되어야 함을 절대시한다. 따라서, 그녀는 자신에게 배신의 뼈저린 아픔을 주었던 트루먼과 그의 부인인 백인여자를 다시 동지와 친구로 받아들여, 자신의 비폭력민권운동의 동조자로 변신시킨다. 이제 그녀는 트루먼에 대해 이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소유욕이나 경멸이 조금도 없는 사랑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정확한 기억에서 나오는 모든 악념을 정화시키는 사랑이었다. 그것은 바로 용서였다”(173). 이 용서는 그를 남성우월주의자에서 남녀평등권자로 변신시킨다.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여자를 혐오했던 그는 지금은 그런 여자의 가르침에도 쾌히 따르는 남자로 재생한다. 게다가, 그녀는 그의 부인인 백인 여자에게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당신을 증오하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그래서, 당신을 미워하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한다”(175).

더욱이, 그녀는 이런 성숙을 바탕으로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참신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사회와 자기를 새롭게 보고, 자신의 새로운 책임과 역할을 정확하고 타당하게 파악하여 실천할 수 있다. 과거에는 교회를 싫어하고 교인들을 멸시했지만, 1968년 여름부터 이따금 여러 종파의 교회에 가본다. 자기는 전혀 모르는 동안, 스스로를 이방인으로 착각할 만큼 자신의 선입관과는 달리 교회건물, 분위기, 의식, 음악, 그리고 교인들이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청년들은 월남전에 참전해서는 안되며, 처녀들은 세속적으로 바람직한 남편감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창조적이고 이타적인 일에 전념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늙은이들은 마땅히 전개되어야 할 민권운동의 무거운 짐을 젊은이들에게 떠넘긴 무책임과 나태를 부끄러워해야 하며, 흑인 교사들은 학생들의 능력을 불신하여 교육에 나태함을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교인들을 타이르고 꾸짖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 머리디언은 지금까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었던 수백만명 흑인들의 뜻이 그 설교에 담겨 있음에28) 깜짝 놀란다. 또, 비폭력민권운동을 통해 성취하려던 흑인들과의 일체감과 공동체의식을 완벽하게 실현시키고 있는 목사를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한다.

그녀는 이 경탄으로 말미암아 마치 지금까지 가슴을 꽁꽁 묶고 있던 밧줄이 풀린 것처럼 자유스럽고 시원하게 숨쉴 수 있다. 이 상쾌함은 경탄의 근원이 “공동체정신, 단합, 그리고 도덕적으로 정당한 합의”(199)에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삶과 사회의 변화의 필수적인 바탕인 그런 정신의 고취와 합의의 도출을 직접 목격하고,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한다. 그녀는 삶과 사회의 전체성을 깨뜨리지 않는 그런 고취와 도출의 극대화는 부단한 자기성숙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확신한다. 따라서, 자기성숙을 삶과 사회의 변화의 가장 이상적이고 타당한 철학이며 방법이라고 간주하는 그녀는 효과적인 설득과 단합을 통해 흑인들의 의식 개혁에 기여할 수 있다. 게다가, 그녀가 품는 사랑과 애정이 그들에게 그런 개혁을 초래할 수 있다는 장기적인 희망과 용기, 그리고 자신감을 고취시킬 수 있다. 그녀의 이런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역할에 반해, 소위 혁명가들은 자기들의 단기적인 목적달성과 가시적인 효과에만 급급하기 때문에 흑인들을 사분오열시키고, 사태를 악화시키는 과오를 범한다. 그들은 흑인들의 친구로서 시작했다가, 결국은 적으로서 끝난다. 그녀는 젊은 흑인예술가가 교회 유리창에 그린 한 손에는 기타를, 다른 한 손에는 피가 떨어지는 칼을 든 흑인 남자를 보고서, 이제는 필요하고 정당하다면 살인도 할 수 있다는 능력과 의식의 소유자로 변신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명과 역할은 흑인들의 삶에 투철한 역사의식과 공고한 공동체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는 노래를 불러주는 일이라고 깨닫고, 그렇게 할 것을 굳게 결심한다.


She thought, perhaps it will be my part to walk behind the real revolutionaries―those who know they must spill blood in order to help the poor and the black and therefore go right ahead―and when they stop to wash off the blood and find their throats too choked with the smell of murdered flesh to sing, I will come forward and sing from memory songs they will need once more to hear. For it is the song of the people, transformed by the experience of each generation, that holds them together, and if any part of it is lost the people suffer and are without soul. If I can only do that, my role will not have been a useless one after all.  (201)


그녀의 노래는 개인의 노래이지만, 흑인들의 삶을 지탱해주고 향상시켜주는 원동력이다. 또, 그들의 투철한 역사의식과 공고한 공동체의식을 고취, 확장시키는 마술적인 힘의 원천이다. 그들의 억압과 좌절로 얼룩진 비극적인 삶, 그리고 그 비극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용기로 충만한 삶에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노래이다. 게다가, 그들에게 삶의 예지를 가르쳐주는 진리의 빛이다. 그렇다면, 이 노래의 위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 위력은 많은 사람들이 꺼리는 그녀의 주체적 자아탐구와 실현에서 솟아나온다. 또, 그 위력은 자기앎과 정의를 바탕으로 하는 그녀의 이런 철학―“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가치는 만물과 하나가 되는 완전한 인간성이다”―으로부터 용솟음친다.


"Your ambivalence will always be deplored by people who consider themselves revolutionists, and your unorthodox behavior will cause traditionalists to gnash their teeth," said Truman, who was not, himself, concerned about either group. To him, they were practically imaginary. It was still amazing to him how deeply Meridian allowed an idea―no matter where it came from―to penetrate her life.

"I hate to think of you always alone."

"But that is my value," said Meridian. "Besides, all the people who are as alone as I am will one day gather at the river. We will watch the evening sun go down. And in the darkness maybe we will know the truth."  (219-20)


이런 철학 때문에, 그녀는 건강을 회복하고 머리가 다시 돋아나자, 차양있는 모자를 버리고 그 도시를 떠나면서, 스스로 자기철학의 계승자가 된 트루먼 헬드가 비폭력민권운동의 자기역할을 차질없이 수행하도록 한다. 그녀는 이렇게 그를 주체적 자아탐구자로 재생시키고서, 또다른 곳,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철학을 설파, 확신시키기 위해 큰 자부심과 자신감 그리고 높은 긍지를 지니고 떠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워커는 소설창작목적과 주제를 자신과 모든 독자가 어떻게 하면 자기앎, 자아탐구, 그리고 자기 성숙을 최대한으로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확장할 수 있으며, 그 확장이 어떻게 투철한 역사의식과 공고한 공동체 의식을 고취할 수 있느냐의 문제에 귀착시키고 있다. 그녀는 그 확장과 의식의 고취 여부는 오로지 가장 타당한 인간의 정의와 삶의 목적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그녀는 인간을 이렇게 정의한다: “모든 여자(인간)는 자신만의 [자유스럽고 창조적인] 생활과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삶에 생동감을 충만시켜 주는 남자(이성)를 갈망한다.” 또, 삶의 목적은 “개인의 자주성, 자립, 그리고 자아실현”을 바탕으로 하는 이런 철학―“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가치는 만물과 하나가 되는 완전한 인간성이다”―의 실현과 그 전파에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머리디언 아가씨 의 머리디언 힐이 그레인쥐 코우플런드의 제 3의 인생 의 마거리트, 멤, 그리고 루스가 마주치는 삶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자기 성숙에 헌신하는 삶의 묘사를 통해, 워커가 그러한 정의와 목적을 성공적으로 구현시켰음을 앞에서 고찰했다.

이 고찰에서, 워커가 지니는 인간의 정의와는 너무나 상반되는 삶, 즉 인종과 성차별의 억압과 그에 따른 좌절감의 피해자들인 마거리트와 멤의 비극적인 삶, 이런 억압과 질곡에서 해방되려는 루스의 반항정신과 변화욕구로 충만된 삶, 그리고 그런 정신과 욕구의 충족에만 급급하여 삶과 사회의 전체성을 깨뜨리는 일방적이고 독선적이며 편협한 관념과 목적에 맹종하는 삶보다도 가장 이상적인 변화의 원천적인 자기앎, 정의 그리고 성숙을 바탕으로 투철한 역사의식과 공고한 공동체의식을 절대시하는 머리디언 힐의 삶의 진가와 의의가 부각, 강조되었다. 머리디언은 워커의 소설창작목적과 주제를 완벽하게 달성, 구현시킨 주인공이며, 우리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의 본보기이다. 머리디언은 워커와 동일한 삶의 목적을 가지고, 그 달성에 헌신함을 통해 이를 가능케 한다. 그녀는 전인적인 삶,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의 변화와 향상, 그리고 자유와 정의의 균등한 확산을 추구하면서, 그 구성원들의 사분오열을 피하고 굳은 결합을 도모한다. 워커는 전인적인 삶과 사회구성원들의 굳은 결합의 전제가 삶과 사회의 변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갈파한다.

워커가 이런 삶과 사회의 변화의 궁극적인 목표가 우리에게 어떤 의의와 가치가 있을까? 그 목표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임을 속단하고 부정해 버려도 되는가? 그래서는 절대로 안된다. 우리는 19세기말부터 강하게 불기 시작한 스스로의 변화욕구와 외부세계로부터 몰아닥치는 변화의 불가피성의 두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다. 워커의 사회변화철학에 입각해서 보았을 때, 과연 우리는 이런 변화의 가장 이상적인 초래를 위해, 우선적으로 자기앎과 정의를 탐구함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그저 끌려오고 끌려 다니는 변화에 속수무책이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이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판단하는 길은 우리가 변화를 초래하는 과정에서 워커의 인간의 정의와 삶의 목적을 어떻게 얼마나 수용해 왔으며, 또 투철한 역사의식과 공고한 공동체 의식을 확신시켜 왔는지, 아니면 오히려 이를 말살시켜 왔는지를 따져보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의 판단보다도 더욱 더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우리의 변화가 자기 앎, 정의, 그리고 성숙에 얼마나 의존했는지, 그리고 만약 그 의존 정도가 미미했으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깊이 자성하고, 그것들에 철저하게 의존할 수 있는 미래의 방도와 대책을 강구하면서, 자아탐구와 실현에 삶과 사회의 변화의 철학과 방향을 두려는 강한 의지와 그 실천의 문제이다.

그런 깊은 자성과 대책 강구 그리고 의지의 실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워커의 소설창작철학과 주제 그리고 인간의 정의와 삶의 목적을 우리의 삶과 사회의 변화의 기본 철학으로 수용해야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녀의 소설가로서의 이런 사명감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소설가로서 나의 전체적인 계획과 목표는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 위해 역사를 배우는 일이다. . . . 나는 역사에 강한 집착과 애정 그리고 언제나 역사를 상기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가장 가공하고 경계해야 할 사실들 중의 하나는 얼마나 많은 과거, 특히 우리(흑인들)의 얼마나 많은 과거가 망각되어 가고 있는가를 외면하는 현실이다.” 우리의 과거에 대한 지식 그리고 그 간직과 보존에 대해 깊이 반성하면서 역사와 역사의식의 절대적 중요성을 깨달을 때, 우리는 바람직한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런 변화를 위해서는, 일방적이고 독선적이며 편협한 관념과 목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 신비스러움에 대한 그녀의 믿음과 그 가치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내가 나의 삶과 소설창작에서 [언제나 가장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신비스러움의 의식과 신비스러움에 열려 있음이다. [왜냐하면] 신비스러움은 나에게 어떤 정치, 인종, 혹은 지리적 위치보다도 더욱더 심오하기 [때문이다].”29) 워커 소설연구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필수적인 가치와 의의를 지닌다고 단정지을 수 있겠다.   

Abstract


Alice Walker's Theory of Fiction and Practice:

Life Is a Source of Change and Growth



Alice Walker's writing is based on self-knowledge and self-growth, which play a crucial role in letting her and readers lead a self-reliant life and attain a state of oneness with all things. In The Third Life of Grange Copeland she describes a poverty-stricken and tragic life of Margaret and Mem, two victims of racism and sexism who desire an unrealized life of happiness, abundance, and creativity, and a hopeful, optimistic life of Ruth who rebels against racism and is desirous of personal and social change. Owing to their lack of self-knowledge, these three heroines are too limited and naive in looking at their own self and society. Their obsession with personal matters makes them incapable of having a deep interest in and coping with social situations and problems. So Margaret and Mem are unable to escape from oppression and frustration, and Ruth to understand the difficulty and complexity of change and reform. However, in Meridian she creates a heroine, Meridian Hill, who transcends the limitation and na?vet? of Margaret, Mem, and Ruth. Meridian's capacity of transcendence comes from her search for self-knowledge, which enables her to escape from oppression and frustration, to lead an independent and creative life, and to know how to overcome the difficulty and complexity of social change that are radicals' dogma and black people's ignorance. Moreover, her personal change based on self-knowledge and self-growth helps expand readers'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communal spirit, and strength the wholeness of an individual and society. Through her emphasis on the importance and necessity of search for self-knowledge and self-growth in social change, she becomes not a victim but a victor in racism and sexism, and her change results in not a division but unity. In short, the emphasis lets her successfully realize a state of oneness with all people.


출처:한국아메리카학회